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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발자취를 따라가다전북대학교 사학과 문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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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6.27  09:4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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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예전부터 왜 하필 국외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상해였을까 무척이나 궁금했는데 이번 전북서부보훈지청에서 주관한 국외 사적지 답사단원으로 참여한 후 궁금증이 풀렸다. 직접 100년이 넘은 건물들이 와이탄 강을 따라 여전히 남아있는 것을 보며 그 당시의 지역 규모를 이해하고, 상해라는 곳이 아편전쟁이라는 아픈 역사를 갖고 있으며, 프랑스 혁명의 ‘자유, 평등, 박애’ 정신이 통하는 조계지였음을 알고, 제국주의에 맞선 독립운동의 근거지도 되어줄 수 있었겠다고 깨달았다.

개방된 큰 도시에서의 독립운동은 여러모로 도움 받을 것이 많았지만, 답사지를 옮겨가며 느낀 것은 독립운동에 난관이 더 많아졌음이었다. 상해에서 가흥, 해염 등으로의 이동은 오래 차를 타야했고, 길도 순탄하지 않았다. 나는 임시정부하면 언제나 ‘상해’만을 생각하곤 하는데, 임시정부가 어려울 때 먼 곳까지 숨어 들어가면서도 여전히 명맥을 유지했다는 점을 통해 임시정부의 가치를 이해할 수 있었다.

매만가 피난처의 정원에 앉았을 때는, 장예모 감독의 영화 ‘인생’ 속 집들이 그려졌다. 중국의 옛 주거지 모습을 떠올렸던 것이었지만, 역사의 흐름 속 때로는 잘못된 것 같으나 변혁 속에서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를 맞이했다는 점이 독립운동가분들의 삶과 연결되어졌다. 일제강점기라는 어둠의 시대를 지나셨지만, 고난을 지나 독립이 분명히 와 자유를 얻게 되었음을 역사를 통해 우리가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중국은 스무살 나의 첫 해외 답사지였고, 올해 다섯 번째 방문이지만 나날이 발전하는 모습을 보며 대단함을 느꼈다. 홍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던진 그 장소에는 커다란 경기장이 들어서 있었다. 발전하는 그 도시 속 회청교와 마도가는 남았지만, 김구 선생과 가족이 살던 곳을 찾을 수 없었다. 그 다리만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그 아픔과 노력들을 보았다는 생각을 했다. 또 장소가 없어져도 그 역사만큼은 기억되어져야 함을 깨달았다.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의 역사를 대변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비율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국민이 주인인 나라’를 꿈꾸며 세워졌고, 각지에 떨어져 있는 독립운동가들과 단체들의 통합을 위해 노력했던 점, 납북이 나눠지기 전 하나의 나라를 꿈꾸었던 점, 지금의 자유 대한민국의 뿌리였음을 되새기게 되었다.

이번 답사를 통해 내가 서있는 이곳에서 길을 잃었을 때 물이 어디서 왔음을 다시 기억해보는 좋은 계기가 되었고, 짧은 생애 편히 살다 갈 수 있던 쉬운 길을 버리고 목숨바쳐 우리나라를 되찾고, 지키고, 자유민주주의를 뿌리내려주신 선열들게 감사한다.

이번 6월 호국보훈의 달이 예년과 다르게 소중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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