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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촌 사랑방’이 왜 고창에?진윤식 | (사)고창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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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9.25  11:0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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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윤식 이사장

지난 7월1일 일본의 아베 총리가 우리나라에 대한 수출 제한 조치를 취하면서, 우리나라 국민들 사이에서 “노(no) 재팬 운동”, 즉 일본 제품 사지말자, 일본여행 가지 말자 등의 반일 운동이 시작되면서 반일 감정이 온 나라에 퍼지고 있었다. 이는 지난날 일본에게 35년간의 침략과 지배를 당했던 민족으로서, 선열들이 당했던 고통을 생각하면 지금 우리가 경제 전쟁을 선포한 일본에게 당하고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지난 날 비록 독립운동은 못했을지언정, 이제 불매운동이라도 해야 한다는 각오를 스스로 다짐 하면서 의지를 다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이번 일은 어느 정치인이 정치적으로는 타협을 하더라도, 그와 관계없이 지속적으로 유지 되어야 한다고 다짐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7월17일 제헌절을 맞이하여 고창 관내에 수십 매의 플래카드가 게시되었다. 100세 되신 연세대 김형석 교수의 강연이 있단다. 어느 지인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고창문화의전당으로 달려가 봤다. 그러나 “백세 철학자 김형석교수의 강연”이란 말은 명목에 불과 할뿐, 사실은 ‘인촌 사랑방’ 발족식을 위한 사전 준비 작업의 일환이었다.

 ‘인촌 사랑방’ 발족식 안내문
“3·1 운동과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이신 ‘온 겨레 마음의 별 인촌선생’(조지훈)께서 참담하게도 ‘친일파’로 부관참시 되고 있습니다. 이에 제헌절을 맞이하여 제헌헌법의 숨은 공로자 인촌선생의 겨레 위한 삶을 기리는 강연회와 함께 인촌선생의 나라사랑 정신을 계승 발전코자 하는 ‘인촌 사랑방’ 발족식을 갖습니다.” 그러나 주관 단체의 명의는 없었다.
그렇다면 인촌과 고창과의 관계는 무엇이기에 ‘인촌 사랑방’을 고창에 와서 결성하려 하는가? 구체적으로 정리해 보도록 하겠다.

 인촌과 고창과의 관계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거의 연관성이 없다. 물론 고창 출생인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1891년생인 그가 1907년부터 1909년 사이에, 그의 부모와 형제 가문은 모두 부안군 건선면(줄포)으로 이사를 하였다. 다만 삼양사(해리 심원에 걸쳐 소유한 토지) 등에서 소출되는 소작료는 잘 챙겨 갔다.

여기에서 잠시, 그 당시 시대 상황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1894년 3월20일 무장현 구수내에서 전봉준·손화중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무장· 고창·흥덕 3현의 농민군 3500여명이 고부성을 점령한 뒤, 그동안 백성들에게 포악하게 굴고 재물을 수탈해 갔던 고부군수 조병갑 등을 축출하고 여세를 몰아 전주성까지 점령하게 된다. 그러나 이때에 일본군이 침략해 들어와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하자, 관군과 12개조 폐정 개혁안에 합의를 한 후 전주성에서 자진 철수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일 뿐, 일본군이 6월21일 경복궁을 점령함으로써 조선 정부의 실권은 사실상 일본으로 넘어가게 되고, 이런 기회를 틈 타서 우리나라의 지주들이나 세력가들은 일본으로 쌀을 수출하기 시작 하는데, 이들 중 한 가문이 바로 인촌가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쌀을 보다 안전하게 수출하는 방법 중 하나가 줄포항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줄포에는 경찰을 포함한 일본 헌병대가 주둔하고 있기에 안전을 보호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고창은 출생지로서의 이름과 삼양사 농지 소작료를 수집해 가는 기능만 있을 뿐, 나머지에 대하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런 것도 모르는 일반인들이야 훗날 인촌의 4남 김상흠이 국회의원에 출마하니 2번씩이나 당선시켜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인촌가에서 고창을 위해서 또는 고창군민을 위해서 어떤 큰일을 해 줬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바 없다.

 인촌가(仁村家)의 재산 형성과정
인촌가(仁村家)에서 재산 축적 과정에 반드시 알고 가야할 부분이 바로 고창군 부안면(당시는 고부군 부안면)에서 부안군 건선면(줄포)으로 이사간 전후의 상황 문제이다.

초기 인촌의 조부(김요협)께서 처가로부터 물려받은 약간의 전답이 1909년도에 1200석 규모로 늘어났다는 점이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일본군이 침략해 들어오고 일본군과 관군의 합동 작전에 의해 동학농민군이 섬멸된 이후, 일본군의 보호를 받는 인촌가는 쌀을 수출하는데 있어 아무런 걸림돌이 없게 되었다. 상대적으로 조선 백성들은 쌀의 품귀 현상과 가격 폭등으로 인하여 굶어 죽는 사람이 발생하는 등, 국내 상황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시작에 불과할 뿐 1910년 무렵 일제의 토지 조사사업 즉, 측량 사업이 진행되었다. 이 측량 사업이 실시되면서 수많은 조선의 농민들은 농지로부터 배제되었으며, 그들은 만주를 비롯한 해외로 이주하게 된다. 한번 생각해 보자. 내 나라 내 땅에서 밀려나 만주 땅 허허벌판에 선 백성들을 생각해 보자. 겨울에는 영하 2~30도의 가혹한 추위 속에서, 겨울 작물은 아무것도 심을 수 없는 동토(凍土)의 벌판에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여기에 그 시대 처절한 상황에 휩쓸려간 어느 시인의 시 한편을 들여다보자.

 절정/이육사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껴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시대의 채찍에 갈겨 서릿발 칼날 위에 선 이 땅의 농민들! 시대의 변혁을 꿈 꿨던 동학농민군들! 그리고 이 땅의 의병들!

일제의 토지 조사사업(측량)이 끝나던 1918년경 인촌가의 토지는 1만 1700여 마지기가 되고, 1924년 당시의 재산은 1만8천석의 토지라고 하였다. 여기에는 이 나라 농민들의 피와 눈물도 함께 범벅이 돼 있었으리라.

부관참시(剖棺斬屍)
앞에서 기록 한 바와 같이 “3·1 운동과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이신 ‘온 겨레 마음의 별 인촌선생’(조지훈)께서 참담하게도 ‘친일파로 부관참시’(剖棺斬屍) 되고 있다”고 하였다. 이 말의 방향성이 어느 쪽을 기리 키는가를 잘 모르겠는데, 아마 외부를 향해서 한 말로 보인다. 그래서 방향성을 가르쳐 줘야 할 것 같다.

부관참시라는 말은, 사람은 이미 죽었는데 후에 그의 죄상이 드러나, 죽은 이의 관을 꺼내 시신에게 다시 형벌을 가하는 것으로써, 당파 싸움이 심했던 조선왕조에서 간혹 행해졌던 형벌 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인촌의 부관참시자는 누구인가? 아마 『친일인명사전』에 등재토록 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 책자를 한번이라도 읽어 보셨는가를 묻고 싶다. 왜냐 하면, 어느 특정인을 잘못 입력함으로써 발생될 수 있는 파장을 최대한 줄이기 위하여, 객관적인 기준과 자료를 근거로 하여 작성됐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인촌이 이 자료에 등재됨으로써 명예가 훼손되었다면 이때가 비로소 죽은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고, 명예회복을 시켜야 한다고 해서 소송을 제기하였다. 다행히 승소하였더라면 명예회복이 되었을 터인데, 패소가 되고 보니, 하지 않으니만 못하고, 결과는 ‘부관참시’ 한 모양새가 돼버린 것 아닌가? 그렇다면 당연히 복권 소송을 제기했던 사람들에게 해야 할 말을 다른 사람들에게 덮어씌우려 하는 것 아닌가? 제3자가 들으면 마치 누명을 씌우는 것처럼 들리지 않겠는가?

인촌 사랑방
인촌 사랑방이 왜 고창에 있어야 하는가? 서울에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소책자 「인촌 김성수-바로알기」(중앙교우회 2002년 9월26일, 56쪽) ‘인촌선생 생가’ 편을 보면, “이 건물은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이며 정치·언론, 교육, 문화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우리 근대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인촌 김성수(1891-1955)선생의 생가 터다. (중략) 1907년 봄, 그 당시 이 고장을 휩쓸던 화적 때의 행패와 귀화(鬼火)의 출몰 때문에 현 부안군 줄포면 줄포리로 양가가 다 같이 이사를 하였다”고 쓰여 있다.

이런 황당한 거짓말이 어디 있는가? “화적떼의 행패와 귀화 때문에” 이사를 하였다? 이는 명백한 거짓말이다.

1894년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전에는 화적(火賊), 이른바 명화적(明火賊)이라 하여, 도둑들이 산속에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횃불을 들고 마을을 습격하여, 곡식과 재물을 약탈해 가는 무리들이 다수 있었다. 그러나 갑오년 가을 동학농민군들이 공주 우금티 전투의 패배를 시작으로 논산 황화대 전투, 금구 원평의 구미란 전투, 그리고 장흥 석대들 전투 등에서 관군과 일본군의 합동 작전에 의해 처절하게 참패를 당한 이후 동학농민군도 화적 떼도 모두 사라져 버렸다. 혹여 화적떼라 하더라도 약탈하다 잡히면 농민군으로 몰려 죽음을 면치 못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앞서 이야기 한 바와 같이 인촌가의 줄포로의 이사는, 순전히 일본 헌병대의 보호 하에 안전하게 쌀 수출을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런 목적성을 가지고 떠난 사람들을 애먼 화적떼니 귀화니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여기에서 전 연세대학교 김용섭 교수의 논문을 들여다 보자. “김성수가 객관적으로 친일파이고 또 그의 집안이 일본 자본주의에 편승해 돈을 벌었다 하더라도, 그와 그의 집안사람들이 조선 농민들에게 한없는 사랑을 베풀었더라면 김성수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수 있었다. 조선 농민들을 배려했다는 점이 인증되면, 객관적인 친일 행위에도 불구하고, 그를 민족주의자 혹은 휴머니스트라고 부를 가능성이 존재한다”라고….

“그러나 그는 1923년을 기준으로 김기중, 김성수, 김재수 3부자 명의의 땅을 경작하는 소작 농민은 1978명이었으며, 그중 반수 이상은 경작 토지가 3단보(450평)에도 미치지 못하는 영세농이었으며, 2053필지 중에서 6년간 소작인 변동이 없었던 것은 845필지에 불과”하였단다. “이처럼 소작인을 수시로 교체함으로서 소작인의 충성을 이끌어 내는 한편 소작 조건을 더욱 악화시킬 수 있었다”고 파악했다. “농업 사회에서 소작인이 땅을 내놓는다는 것은 생명을 내놓는 일과 마찬가지이다. 이토록 소작인을 수시로 교체하였다는 점에서 김성수 집안의 인간관(人間觀)의 일면이 드러나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당시 소작료는 얼마씩이나 되었을까?
당시의 관련 자료가 없으니 1987년 토지 투쟁을 통해서 불하받은 해리·심원지역 삼양사 농지 소작료 납부 관련 내용을, 필자가 증언과 자료를 통해서 확인해 보았다. 농사가 못되면 상황에 따라 감액이 있기는 했지만 7:3이 기본이었던 것 같다. 즉, 소작료가 30%이며 밭과 대지는 20%이다. 논 한 방구(600평) 소출이 10섬이면 소작료가 3섬이다. 당시에는 비료가 없는 때이기에 한 마지기에서 석 섬 먹기도 힘들던 시기였다. 그리고 수세는 경작인이 별도로 냈단다.

필자가 이러한 내용을 소상히 밝히는 것은 이렇게 목숨 부지하기도 어려운 가난한 농민들로부터 얻어진 재산을 통하여, 그것도 침략자 일본인의 보호를 등에 업고 얻어진 재산으로, 사회에서 또는 공직에서 무슨 일을 했다고 공이 큰 것처럼 부풀리려 하는데, 이는 모두 가식(假飾)에 불과하며, 위선(僞善)이라고 본다.

어떤 이들은 인촌의 인품이 훌륭하다고 칭찬이 자자하다. 당연히 그럴 수 있다. 그는 양반가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유교를 중심으로 한 예절 교육을 받았을 것이고, 외국 유학을 통하여 국제정세에 안목을 넓혔으니,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그를 추앙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나라 이 민족에게 결코 자애로운 사람은 아니지 않는가? 인촌 관련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경성방직을 살리기 위하여 일본 총독을 만나는 과정이나 젊은 청년 학생들에게 대동아 성전(聖戰)에 목숨을 바치라는 등 말이다.

그러기에 인촌을 되살리려는 행위는 그쳐야 한다. 인촌가에서든 주위에서든 말이다. 왜냐하면 되살리려 하면 할수록 반작용에 따라 추한 모습들만 더 드러날 뿐이다. 한번 돌이켜 생각해 보자. 일본의 침략과 지배를 받은 지 35년, 얼마나 많은 백성이 고통과 죽임을 당했으며, 얼마나 많은 문화재가 약탈을 당했으며, 우리의 말과 글이 침묵을 당해야 했으며, 우리의 이름과 성도 바꾸지 않았는가? 이제는 그것도 모자라 우리 국민을 향해 조롱하고 비아냥거리며 능멸을 하고 있지 않는가?

이 모든 일들이 해방이후 친일청산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데서 비롯됐음을 생각할 때 참으로 억울하지 아니한가? 그것은 바로 우리가 우리 힘으로 승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일본인이 1894년 이 땅에 처음 들어왔을 때, 그들은 비둘기를 안고 들어온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총칼을 앞세워 동학농민군들을 학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이 강산을 피로 물들이고 모든 것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그런 사람들과 결탁하여, 그런 사람들의 보호 하에 얻어진 부와 권세로 부통령이 되었다고 자랑할 일인가? ‘우리 근대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인촌 김성수선생’이라 했는데, 그 족적이 무엇인가? 그것도 친일 청산을 방해한 이승만 정권하에서 말이다.

 관자에 이르되, 사유(四維)가 펴지지 않으면 나라가 멸망한다고 하였다. 사유 즉, 예의염치(禮義廉恥)를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예(禮)는 절도를 넘어서지 않는 것이고, 의(義)는 스스로 내 세우지 않는 것이고, 염(廉)은 잘못을 은폐하지 않는 것이고, 치(恥)는 그릇된 것에 따르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다.

‘인촌 사랑방’을 꾸미려 하시는 분들, 위의 글 중 세 번째, 잘못을 은폐하려 하는 것은 아닌지 깊이 생각해 보실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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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기
진회장님 좋은글 너무 감명깊게 읽었습니다.저도 처음 보는 내용보고 엄청 놀라울 정도입니다.넘 좋은 내용이라 좀 빌려감니다
(2019-09-26 00:06:08)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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